새해가 되면 사람들이 희망을 얘기하는 게 일반 정서다. 그러나 기해(己亥)년 아침에 대다수 국민의 마음을 지배하는 정서는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화염과 분노’를 토해내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북 공세도, ‘핵단추가 내 책상위에 있다’ 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위협 같은 것도 올해엔 나오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력은 작년 ‘3050클럽’에 들어갔다. 개인국민소득 5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넘는 7번째 나라가 됐으니 수치상으론 부강해졌다.

그런데, 왜 새해 아침에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희망을 그리지 못할까. 그건 아마 잠시 잠자듯 하는 북한 핵문제가 어떤 모습으로 깨어날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또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미·중 무역 전쟁이 어떻게 악화일로에 있는 한국 경제를 뒤흔들어 놓을지 모른다는 이중의 불안감을 씻어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년에도 그랬듯이 기해년 새벽의 뉴스 메이커는 김정은이었다. 그의 TV 신년사 발표 모습 자체가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인민복이 아니라 양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신년사를 발표했다. 그런 모습에 큰 인상을 받은 듯 TV시사토론에 출연한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정상국가로 가려는 제스처라고 높이 평가했다. 마치 서방국가 정상, 특히 미국 대통령이 TV연설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태도에서, 정상(定常)국가 원수처럼 보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종래의 ‘핵·경제 병진정책’을 언급하지 않았고, 단순히 경제 발전 정책을 죽 열거했다. 그의 입에서 원자력, 풍력, 석탄, 조수력이란 말이 나왔고 과학기술과 인재육성을 강조했다. 북한의 에너지 문제가 절실하고 그 분야에 힘을 쏟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건 역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대한 그의 언급이다.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궁극적 해결 방안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있고, 그 열쇠는 바로 현재로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담판과 합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미국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문재인 한국 대통령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문 대통령의 힘은 중재 역할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은 정교했다. 그는 국방력과 전투력 강화를 강조했지만 남한을 겨냥하는 표현은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높이 평가하면서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 공동선언, 북남 군사 분야 합의서를 사실상의 불가침 선언으로써 참으로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한국을 향해 보낸 메시지가 미묘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바로 한미합동군사훈련과 남북교류 재개에 대한 것이다. 그는 “외세와의 합동 군사연습을 더 이상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외부로부터의 전략자산을 비롯한 전쟁장비 반입도 완전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남북 교류의 핵심 현안인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조건 없이 재개할 용의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 메시지가 한국 정부에 줄 압박감, 고민, 희망을 김정은이 짚어봤을 것이다. 유엔의 대북제재가 계속되는 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리 없지만, 이를 지렛대로 한국정부를 움직여 대북제재를 완화해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미국 정부를 향해 던진 메시지다. 그는 트럼프대통령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제2차 북미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언론의 지적처럼 가시가 달린 올리브(평화)가지를 내밀었다. “다만 미국이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모습을 강요하려 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가시를 단 것이다.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비핵화를 언급한 대목을 놓고 국내외에서 말이 많다. 그는 “우리는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하여 내외에 선포하고 여러 가지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 왔다”고 언급했다. 북한의 비핵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 메시지가 실질적으로 비핵화협상을 할 의지가 없고 북미협상을 핵군축협상으로 몰고 갈 뜻을 비친 것이라고 읽는다.

지난 6월12일 북·미정상회담 이후 핵협상의 물꼬가 트였지만, 큰 틀에서 보면 미국은 핵무기와 핵시설을 포함한 핵 리스트 제출을 요구하고 북한은 구체적 체제보장을 요구하며 사실상 협상은 교착상태에 있다.

이번 김정은 신년사는 흥미로운 여운을 남겼다. 그것은 김정은이 트럼프와 2차 북미정상회담을 할 의도를 교묘하게 내비친 것이고, 트럼프도 화답했다는 점이다. 김정은이 공개적인 신년사에 이어 개인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트럼프는 2일 내각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훌륭한 친서를 받았다. 또 하나의 회담을 하게 될 것”이라고 2차 정상회담을 비쳤다.

북미 관계 긴장의 고비마다 김정은 친서는 미묘한 기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의 귀추가 주목된다. 한때 김정은을 ‘로켓맨’이라며 적대적 감정을 드러냈던 트럼프가 1차 정상회담 이후 “그와 사랑에 빠졌다(fell in love)고 표현을 180도 바꿨다. 이런 맥락에서 2019년에 트럼프와 김정은이 어떤 춤을 출지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지금 미국의 정국은 혼미스럽다. 민주당은 하원을 장악하여 트럼프 견제에 들어갔고, 올해 가을부터는 본격적인 대통령 예비선거가 시작된다. 재선에 도전하는 트럼프가 무슨 얘기치 않는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다. 작년 연초에 비하면 올해 연초는 남북관계나 북미관계에서 훨씬 평화롭다. 그러나 핵문제의 불안은 지난 25년간 간단없이 우리를 괴롭혀 왔다는 점에서 불안은 도사리고 있다.

본질적인 것은 김정은에게 ‘핵 폐기’가 ‘핵 보유’보다 북한체제에 더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과제를 안고 있다. <뉴스1 고문>
저작권자 © 뉴스1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